2007년 10월에 썼던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증보한 잡글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몇몇 분들이 이전 글을 퍼가셨던데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일부 오류를 다잡고 내용을 보강했습니다.


1. 시호란 무엇인가?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상징인 이름(名)을 존중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 앞에서나 썼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피휘(避諱) 전통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대신한 자(字), 호(號), 시호(諡號) 등을 썼다. 우리 선조들은 피휘를 지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절대로 작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본명에 들어가는 글자는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에 사용이 금지됐다. 정조(正祖)의 휘인 산()처럼 대다수 임금들은 왕자의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로 지었다. 아예 없는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래야만 피휘하기 쉽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더했다. 시호(諡號)란 죽은 이의 행적을 살펴 붙여주는 존호(尊號)의 일종이다. 왕족, 제후, 공신, 학자를 비롯한 빼어난 행적을 남긴 사람 등이 죽으면 나라에서 시호를 올리거나 하사했다. 이순신과 제갈량이 받은 충무(忠武)는 가장 널리 알려진 시호 가운데 하나다. 시호도 넓은 의미의 호이지만 일반적인 호와는 달리 사후에 생시의 행적을 평가하여 국가가 망자에게 내린 칭호이다. 특히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이름을 바꾸어주는 은전(易名之典)이라고 하여 당사자나 자손의 큰 영광으로 삼았다.


시호는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2. 시호 짓는 법

시호는 살아있을 때의 업적을 참작해 몇 개의 자(字)로 집약한다. 본래 시호의 취지는 착한 일을 한 분에게는 선시(善諡)를 주고, 나쁜 일을 한 이에게는 악시(惡諡)를 주어 후대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하고 자식이 아비를 평가하고 신하가 왕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시호 제도를 폐지한다. 진시황은 자신을 시호로 부르지 말고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명했으며 다음 왕을 이세황제(二世皇帝), 삼세황제(三世皇帝)라 하여 자자손손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과연 진시황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이후 시호 제도는 부활해서 점점 정교하게 발달했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후대로 내려올수록 악시를 짓는 일이 줄어들고 좋은 뜻의 시호만 짓게 되는 경향이 심화된다. 시호를 한번 지으면 거의 고치기 힘든 점에 비추어 기왕이면 좋게 지어주려는 경향은 옛날부터 있은 모양이다. 『논어』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위(衛)나라 대부였던 공어(孔圉)의 시호가 어째서 ‘문(文)’이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듣기에 따라 시호 인플레를 따지는 질문이다. 공자는 “명민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에 그를 文이라 이른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설명한다.


시호로 쓰는 글자는 제한되어 있는데 문(文)뿐만 아니라 충(忠), 공(恭), 무(武), 숙(肅), 의(義), 정(貞), 장(莊), 효(孝) 등 많이 쓰이는 시자(諡字)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시호에 담긴 뜻을 시주(諡註)라고 하는데 어떤 뜻의 글자를 받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구분된다. 문(文)의 경우만 해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經天緯地)/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學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비롭고 은혜롭다(敬直慈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敏而好學)/ 백성을 슬퍼하고 은혜롭게 하며 예로 대접한다(愍民惠禮) 등의 많은 시주가 있다.


결국 공자가 공어의 시호가 문(文)이 된 것은 그의 행적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민이호학(敏而好學) 등의 장점이 있으니 그런 시호를 받을 만하다고 평한 것이다. 단 한 가지 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취해 시호로 삼아 악을 숨겨 주고, 오로지 악행만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악시를 주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자주 쓰이는 시자에 다채로운 시주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오늘날 묘비명에도 악행은 좀처럼 기록하기 미안한 것과 매한가지 논리이리라.


조선 조정에서 올린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여기서의 문이 경천위지(經天緯地)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이황의 문순(文純)과 이이의 문성(文成)에서의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들이 도덕박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천위지 다음의 위상이었을 것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죽었을 때 그의 첫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훈구파가 이는 너무 과분하다며 논박하며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에서 박문다견(博學多見)의 문으로 시주도 바꿨다. 이를 볼 때 시자에 딸린 시주에도 어느 정도의 등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호로 쓸 수 있는 글자와 각 글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규정해 놓은 것을 시법(諡法) 또는 시호법이라 한다. 조선초기에는 194자였으나 글자 수의 부족으로 시호 정하기가 어려워지자 세종(世宗)이 명해 301자까지 늘어났으나 활용 빈도가 높았던 글자는 약 120자 정도다. 대표적인 관련 문헌으로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 등이 있다.


소순이 찬한 시법에는 311조에 168개 시자가 수록되어 있어 시호를 결정하는데 참고했다. 인터넷에 정리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 시고(諡考)편 등을 참조할 수 있으나 방대하고 산재해 있어 찾아보기는 힘들 듯싶다. 다행히 이민홍 충북대 교수가 『시법』과 「시법해』를 묶어 번역한 책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3. 고구려의 시호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시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시법과 다른 양상이 많이 보인다. 삼국별로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의 경우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시호에서 출발하는데 생시의 업적을 토대로 만든 시호인지가 불분명하다. 한자어의 뜻에 비추어 동명성왕이나 대무신왕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명왕의 경우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와 누리(累利)라는 휘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한 사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은 한자 도입 초기 의미보다는 소리를 옮기는데 주력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28왕 중에 능의 위치(葬地)를 시호로 쓴 왕이 열두 분이다. 열거하자면 민중왕(4대), 모본왕(5대), 고국천왕(9대), 산상왕(10대), 동천왕(11대), 중천왕(12대), 서천왕(13대), 봉상왕(14대), 미천왕(15대), 고국원왕(16대), 소수림왕(17대), 고국양왕(18대)이다. 이것은 시호라기보다는 능의 이름을 일컫는 능호(陵號)라고 불러야 더 적절할 듯싶다.


고구려의 역대 왕은 시(諡)의 개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號爲○○王” 혹은 “號曰○○王”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가 시호를 강(康)이라고 했다(諡曰康)는 기록 정도다. 다만 28대 보장왕의 경우 왕의 이름 휘가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以失國故無諡)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시와 호가 헛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6대 태조왕(太祖王)과 7대 차대왕(次大王), 8대 신대왕(新大王)은 시(諡)의 개념이 녹아들어 가있다. 특히 태조왕(혹은 國祖王)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가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의미이기에 태조라는 시호가 쓰였다. 또한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나 20대 장수왕(長壽王)도 왕의 특징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 시(諡)의 개념이 있으나 직설적인 표현일 뿐 중국의 시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다음 왕들인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은 휘를 그대로 쓴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중국식 시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다(문자명왕은 다소 예외).


여담이지만 양원왕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평원왕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기록에서 양원이나 평원도 능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고국원왕도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또한 왕이 묻힌 지명일 것이다. 결국 이 복잡한 문제를 풀 실마리는 광개토왕비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다.


국강상(國岡上)은 장지일 것이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넓혔다는 의미이며, 평안(平安)은 말 그대로 태평성세였다는 뜻이다. 호태왕(好太王)은 고구려왕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왕 중의 왕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만약 광개토왕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왕들이 이런 식으로 시호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현전하는 고구려왕의 시호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기록이 미비하여 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왕비의 기록은 고구려에는 고유의 시법이 있었음을 약하게나마 증빙하고 있다.


4. 백제, 신라, 발해의 시호

백제의 왕들은 사료의 부족인지 기록의 소홀인지 알 수 없으나 시호는커녕 장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23대 삼근왕까지 휘에다가 ‘왕’자만 붙인 것인지, 고유의 시법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다. 24대 동성왕(東城王)부터 시호처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글자 그대로는 동쪽의 성이라는 의미일 뿐 중국에서 시법의 용례도 보이지 않는다. 25대 무령왕(武寧王)부터 성왕(聖王),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법왕(法王), 무왕(武王)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시호는 중국의 시법에 모두 있는 글자다.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서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이라 칭하고, 위덕왕 재위 시절 만들어진 국보 제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에서 위덕왕의 휘인 창(昌)이 쓰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호와 더불어 왕의 휘를 직접 쓰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신라도 처음으로 시호를 쓰기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백제는 신라에 앞서 중국의 시법을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신라의 왕 가운데 지증왕이 최초로 시호를 받았다. 『삼국사기』는 “新羅諡法始於此”, 『삼국유사』는 “諡號始于此”라고 명시하여 신라의 시호가 처음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호를 개정하는 등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시호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혹자는 지증이 한국 시법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증이라는 시호는 지철로(智哲路), 지도로(智度路), 지대로(智大路)라는 휘와 관련지어 지었다고 짐작한다(고구려 유리명왕과 비슷한 사례).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뜻까지 나타내려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왕까지는 불교식으로 시호를 지었다. 29대 무열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중국 시법에 맞추어 시호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필 때 신라가 왕의 사후에 당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성덕왕 16년 태자 중경이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고 했고, 흥덕왕 10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했다. 진성왕 2년에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해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는 기사 등으로 볼 때 시호는 자체적으로 정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지은 것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 시대의 발해 역시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올렸다. 신라가 두 자 시호였던 반면에 발해는 한 자 시호를 올렸다. 『신당서』는 발해가 사사로이 연호(年號)와 시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신라 또한 시호를 주체적으로 사용했던 만큼 아마도 발해와 신라의 차이는 독자 연호의 제정 여부였을 것이다. 발해는 문헌상 거의 전 기간 독자 연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독자 연호 기록이 광개토왕비와 일부 금석문에서나마 엿보이는 것에 견주어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대조영을 고왕(高王)이라고 칭한 것은 태조나 고조(高祖)의 의미로 보인다. 이어서 무왕(武王), 문왕(文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 등의 시호가 있었다. 시호가 전하지 않는 왕도 있지만 폐위된 왕을 제외하고는 기록의 탈루인 듯싶다. 일부 기록에서는 시호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발해와 대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협계태씨족보와 영순태씨족보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미상이던 발해 말기 왕들이 화왕(和王), 원왕(元王), 경왕(景王), 애왕(哀王) 등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