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선쟁이

어느 친구가 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넌 어느 하나를 정하면 모든 것을 그것에 맞춰 몰아가는 것 같아.”


뭐 솔직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어느 인식적 틀을 정하면 그걸 기준으로 밀고 나가는 성격인 것 같기는 하다. 좋게 말해 가치관 확립이고 비꼬면 고집불통 막무가내인 셈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정하는 것은 정말 고통이다. 한 번 정하면 계속 밀고 나가는 우직함(?)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결정과정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뛰어들어가기 전에 엄청난 검토를 해대는 것이다.


이건 이제는 다 버렸다고 생각하는 ‘한결같음’에 대한 집착의 그늘이 아직도 내 삶의 양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상 ‘한결주의자’는 위험하다. 그네들의 원칙과 소신은 때로는 과도한 순결주의와 결합하면서 무시무시한 배타성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소심쟁이 익구가 독선적인 마음을 먹게 되기까지는
정말 여러 번 생각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생긴 독선도 언제나 다시 점검하고
언제든지 기꺼이 고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다는 것을...
독선과 독선이 만나서 경쟁하고 절충하는 과정이
독선은커녕 아무 알맹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믿거든.
독선 과잉도 문제지만... 독선 부재도 문제니까...

- 익구, [독선쟁이가 되자] 中


한결같음에의 천착이 나의 아이덴티티라면 무작정 내치기보다는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답답하기 일쑤이고 임기응변은 전무하며, 때를 놓치기 다반사다. 이런 내가 싫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성격심리학이라는 수박을 핥아보고 나서야 겨우 나의 이 못난 성격을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인정은 긴장감을 유지한 인정이다. 지난날의 생각과 경험들이 쌓여 이루어진 지금의 나를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부정하는 모순의 칼날을 기꺼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늘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낯설음이나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언제나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처음과 끝이 같을 수는 없다. 그건 지나친 욕심에 불과해”라고 말씀하셨고, 딴에는 무릎은 쳤지만... 아직도 그 말을 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는 참으로 더딘 놈이다.


나도 그 놈의 냄비근성을 가져보고 싶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정신 없는 세상에서는 활활 타오르다가 이내 식어버리고 또 다른 장작더미를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식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일관성에의 집착은 식을 줄을 모른다. 초라한 결말이 싫어, 애초부터 초라함으로 무장(?)하는 ‘새가슴의 고리’를 끊기가 참 힘들다. 이럴 때는 뻥튀기의 선수들인 정치인들의 기질을 좀 수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 기회주의자

나는 어쩌면 기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교묘한 저울질의 끝은 대개가 중간 어디쯤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양시론, 양비론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래 생각하다보면 상반된 대안의 장단점이 보이면서 그 때부터는 적절한 타협에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많이도 아니고 욕먹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둔다. 이념문제에 민감한 이 땅에서는 좌나 우나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라는 것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날라리 우파’를 선언했다. 아직 해먹을 거리가 많은 ‘범생 우파’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계급의식’ 이전에 심약함의 발로다.


나는 이따금 내가 세속도시에서 유토피아로 밀파된 스파이이거나 유토피아에서 세속도시로 파견된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스파이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불안하고 누추한 회색지대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 ‘책 앞에’ 中


날라리 우파로서의 나는 회색지대가 두렵고 스파이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고종석의 저 말에 한없는 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은연중에 스파이의 과업을 수행하고, 부지불식간에 회색지대로 성큼 나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참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 많은 변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는 나를 ‘극단적 진보’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정치 교과서에 있는 정치 문화에 대한 그래프를 소개해줬다. 그 그래프는 정치적 의견의 동질성 여부를 합의적 정치 문화와 다극적 정치 문화로 나눴다. 극좌부터 극우까지 X축에 두고, Y축은 퍼센티지(%)로 된 구성된 그 그래프에서 합의적 정치 문화는 ∧모양으로, 다극적 정치 문화는 ∨ 모양으로 대략 그려져 있었다.


그 친구는 합의적 정치 문화가 안정적 사회발전을 가져온다면서 나를 비판했다. 무슨 오기였는지 나는 극단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양극단이 부딪히면서 사회가 발전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내게 있던 극치의 아름다움과 타협을 거부한 극단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었다. (물론 각종 문제집의 모범답안들은 당연히(!) 합의적 정치 문화를 지지했다)


하여간 그 때 나나 그 친구나 너무 멀리 나갔다. 그 친구는 기껏해야 ‘눈치 많은 보수’ 정도에 불과한 나에게 극단적 진보라고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씌웠고, 나는 그걸 반박하기는 오히려 ‘극단예찬’을 해대는 잘못을 저질렀다. 적당한 타협과 강요된 굴종에 허우적대는 나를 보면 그 친구도 그 때의 구박을 취소하겠지. 물론 나도 두 발 물러서야겠지만.


기회주의자로서의 익구는 실상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한결같음의 리스크를 감소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들여온 것이 이 녀석이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이 기회주의는 어느덧 내 삶의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대응하며 발전을 위한 변화의 길이라는 그럴듯한 수사로 치장하고서 말이다. 식용을 위해 들여왔다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되었다는 황소 개구리, 기회주의는 내게 있어 꽤나 먹성 좋은 황소개구리다.


3. 똘레랑스(tolerance, 관용)

“소수가 혁명적인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혁명적이다”라고 그람시가 말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거나 돌린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성실한 자세로 몸과 마음으로 설득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진정성을 보여도 또 어쩌다가 상대방의 진정성이 드러날 경우에도 서로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진정성을 보이거나 상대방에 진정성을 보이는 단계까지만 가더라도 성공이지만. 결국 운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무책임하게 둘러댄다. 나는 내게 운이 더 생기기를 바란다.


살아가며 뜻 맞는 사람 만나고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눈 씻고 찾아보면 마음 맞는 사람은 몇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나와 공유할 사람을 찾는 즐거움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 내가 겪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이것이 안정추구의 보수적 성향이라면 딱 그만큼은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게으름의 탓일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난다고들 하지만, 그보다는 어쩌다가 만난 사람들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우연으로 엮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자신과 내 주위 사람들의 변화를 일으키는 ‘미시 혁명’과 만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단 주어진 것에 한 번 긍정하고 들어가니까 딱 그만큼은 보수주의자가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의 폐해일 뿐이다.


다양성, 이질성, 복잡성을 존중하기 위해 무던 애를 쓰는 나는 결국 똘레랑스를 찾았다. 동질성과 단일성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히는 나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디 똘레랑스는 프랑스 수입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라는 기둥과 함께 또 하나의 기둥이 있다. 쏠리다리떼(solidarité), 즉 ‘연대’가 그것이다. 똘레랑스가 개성과 자유의 미덕이라면 쏠리다리떼는 공동체와 연대의 미덕이다.


뭐 구구절절 따질 것도 없이 똘레랑스보다는 쏠리다리떼가 훨씬 진보적이다. 똘레랑스가 내 자유를 옹호하고, 남의 자유를 인정하는 데서 그친다면, 쏠리다리떼는 더 나아가 평등과 박애에 닿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렇지만 나는 똘레랑스에 그쳤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똘레랑스 하나 온전히 수행하기도 너무 벅차다. 무엇보다 앵똘레랑스(불관용)에 단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합니다. 아주 열심히 토론합니다.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tant pis pour lui!)”하며 아주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치고 받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또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290쪽


그러나 이런 나의 모자름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똘레랑스라는 무기는 여전히, 앞으로도 유효하다. 똘레랑스는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뿌리내린 땅에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아웃사이더, 소수파, 비주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는 없다. 그렇기에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뭐 나란 녀석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잘 되지 않는다. 독선쟁이로서 한결같음을 외치다가 기회주의자가 되어 눈치를 보기 시작하다가도 똘레랑스를 들이대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들먹인다. 한마디로 모순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모여 나란 인간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에 대해 째려보기를 그치지 말자. 그러나 가끔은 따스한 눈길을 보내자. 어느 친구의 옛 편지에서 살짝 웃고 만다.


“너야 맨날 긍정적이게 사는 사람이니까 또 웃으면서 세상을 초월해서 살아가구 있겠지...^^;”


나는 절대 세상을 초월해서 살지 못할 것 같다. 오히려 악착같이 붙어서 재미난 인생을 꾸리기 위해 머리를 굴려댈 것이다. 나의 길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아직은 영 흐릿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 약속하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겠다고.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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