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만세!

2005.03.07 16:20 |
호주제가 폐지되었다는 낭보가 들려온 순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회상에 잠겼다. 당시 교지편집부원이었던 나는 편집부 기획의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고심 끝에 양성평등을 주제로 해봤으면 좋겠다고 주장했고, 거기서 조금 확장된 주제인 인간존엄성 문제로 선정되었다. 한해 동안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는 여러 분야의 문제들-즉 남녀 차별, 빈부 격차, 인간 소외, 복제 인간 등의 사회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고민하게 되었는데 나는 처음 생각대로 양성평등 문제를 맡았다.


양성평등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하다가 설문조사를 통한 결과 분석을 하기로 했다. 여러 문항 중에서 담당 선생님의 제안으로 호주제에 대한 생각도 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결과는 폐지 여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여학생들이 많은 서울외고의 특성이 다소 반영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호주제 폐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호주제 폐지해야 한다는 보기에 “반드시!”라고 적혀 있거나 별이 쳐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 때 본 굵은 글씨의 “반드시!”와 빨간 별모양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5년 3월 2일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오랜 세월 양성평등을 저해하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를 존속시켰던 호주제가 폐지된 것을 가슴 깊이 환영한다. 또한 모든 국민이 하나씩 독립된 신분등록부를 갖게 됨으로써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권리를 인정받게 된 것도 기쁜 일이다.


한 80대 여성이 호적등본 떼러 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평생 교사로 일했던 그는 일찍 남편을 잃고 장남의 호적에 올랐으나 몇 해 전 아들도 세상을 떠난 처지였다. 그는 자신이 차남의 가(家)에 입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남의 가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혹시 하며 삼남의 호적등본을 떼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5살짜리 손자의 호적등본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했다.

그 손자는 장남의 혼외자로 그는 자신의 연금으로 양육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 어린애가 자기 집안의 호주라니 어이가 없었다. “오래 산 죄로 사종지도(四從之道)를 걷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혼인 전엔 아버지, 혼인 후엔 남편, 남편 사후엔 아들을 따르라는 삼종지도로도 부족해서 이제 다섯 살 짜리 손자를 호주로 모시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평생 돈을 벌어 세 아들을 키우며 당당한 가장노릇을 해왔는데 법이 끝까지 여자를 사람대접 안 한다고 그는 개탄했다.

- 장명수, [할머니의 사종지도(四從之道)], 한국일보 2003년 6월 1일


그간 민법의 호주승계 순위는 남편→아들→손자→딸→처 순으로 남성 중심이었다. 위의 글처럼 삼종지도도 모자라 사종지도를 만드는 엽기적인 규정이었던 셈이다. 대학교 2학년 때 교양으로 들었던 법학통론 시험에서 호주제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 앞에서 시험 답안으로는 너무 거칠게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써놓고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서 할머니를 제치고 손자가 호주가 되는 현실을 통박한 기억이 난다.


요근래 여풍이 분다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이야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자가 가는 곳에는 이런저런 차별이 아직도 여전하다. 여성 인권 무시의 대표적 사례였던 호주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천만다행이다. 혹자들은 호주제가 가족을 지키는 제도라며 옹호하지만 도대체 그렇게 지키고 싶다는 가족 구성원들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세상의 절반이 희생되어 이룩하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할 수 없다. 제 아내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후세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호주제가 오로지 하나의 형식의 가족만을 인정함으로써 다양하게 존재하는 우리네 가족들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겸허하게 살펴봐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만나서 사는 세상에 오순도순 백년해로하며 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간 이혼한 여성이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할 때 과거의 멍에 때문에 고통받고 그 자녀까지 낙인이 찍히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개개인이 행복해야 가족이 굳건한 것이지 한 개인이나 특정 성이 다른 개인들과 상대 성을 억압하는 구조라면 늘 위태롭고 아슬아슬할 것이다.


호주제 폐지에서 여성 인권의 존중만을 생각하지 말고 남성 인권의 동반 향상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대폭 축소되어 현행 호주제는 사실상 관념적인 제도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가장의 상징적 권위는 은연중에 재생산되고 있었다. 호주제 폐지와 더불어 가장의 어깨에 모든 부담을 덜어주는 시대가 끝났다. 이제 여성이 확대된 권리만큼 늘어날 책임과 의무를 다 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권리의 달콤함만 느끼고 책임은 모른 척 하는 것처럼 꼴 보기 싫은 것도 없다.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의 흐름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깨우쳐야 한다. 남성중심의 세상에 적당히 안주하려는 사고를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개척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남자라는 이유로 특권을 가지던 것이 사라지고, 여자라는 핑계로 책임 앞에 모르쇠가 되지 않을 때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부 설문조사의 마지막 문항은 남녀차별의 사례를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선생님이 회장 찾을 때 누구건(학생도) 남자 회장을 찾는다”는 문구였다. 여남 회장 1인씩 두었던 내 고등학교에서 여자 회장은 양성평등에 따라 할당된 구색을 맞추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냐는 의문 앞에 나는 양성평등주의자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기사를 작성하며 “한결같은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모든 남자들이 한결같이 사내 대장부가 되기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던 당시의 뜨거운 마음은 앞으로도 간직할 것이다. 잉글리시만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녀차별, 양성평등 모두가 우리 마음 속에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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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 2005.03.07 21:5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고등학교때 일이 생각이 나네요.
    고3때 반장선거에 나갔었는데, 저랑 한 남자애가 후보였었어요.
    그때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부르시더라구요.
    선생님은 남자반장이 편하다고.
    담임선생님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했었는데, 많이 실망했었죠.

    호주제 폐지는 우리 국회의원님들 한일 중에 제일 잘한 일 같네요..;;

  2. 새우범생 2005.03.08 22:5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런 당혹스런 일을 겪었다니...ㅡ.ㅡ; 내 고등학교는 여자회장, 남자회장 이렇게 뽑아서 그런 문제는 없었지만 자연스레 남자회장 위주의 운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것을 많이 접했지. 차라리 공정한 경쟁을 통해 한 명의 회장만 뽑는 게 낫겠거니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여하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과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는 남성이 좀 더 많이 늘어나야겠지. 그 담임 선생님의 편견이 먹혀들지 않는 세상이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