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식이 난장판이 된 것에 대한 말들이 많다. 당일날 학교를 와서 대자보를 언뜻 보고 지나치면서 무슨 일이 있겠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벌어진 모양이다. 이번 학위수여식은 누가 봐도 삼성이 100주년 기념관 건립에 거액을 기부한 것에 대한 답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학위수여식을 위해 고대에서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을 것이다. 마치 돈 받고 학위를 파는 듯하지만 꼭 그런 성질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 회장이 철학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분의 철학적 안목(?)을 갑자기 높이 평가하려는 사람도 없을테고 말이다. 여하간 고대에 오신 손님을 박절하게 대한 것은 조금 씁쓸하다.


경영학박사가 아닌 철학박사 수여에 불만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 같은 경영방식에 대한 반발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세계적인 기업에서 노조가 없다는 것에 의아심을 가지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다. 노조 탄압의 무수한 사례들도 적잖이 들어왔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이 비판받을 점이 많겠지만 이만한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탁월한 성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종업원들의 피땀을 빨아 들여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핀잔에도 일면 수긍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업의 사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난잡한 경영으로 진로 기업이 국민들에게 안겨준 열패감을 생각해보면 더욱더 그렇다.


학위수여식 다음 날 있은 이학수 삼성 부회장의 강연회에 앞서 어윤대 고대 총장은 부총장 이하 보직교수들이 사표를 제출했다며 일부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을 야멸치게 비난했다. 거듭된 사양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모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면서 앞으로 고대생들이 삼성에 취업하기 어려울까봐 걱정이라는 엄살도 부렸다. 200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강 무산 사태에는 없었던 보직교수 사퇴는 과공비례(過恭非禮)이며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다. 이어 강연에 나선 이학수 부회장은 극소수 학생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가 삼성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며 여유를 보였다. 사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삼성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개진하지 않은 절대 다수가 삼성을 반대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차라리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처럼 "젊은 사람들이 패기에 넘쳐 하는 것"이라며 넘어갔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고대 출신 임원으로서의 서운함이 느껴져서 차마 더 타박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문득 삼국사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견훤(진훤이라 읽어야 한다는 설도 있음)이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처치하고 경순왕을 세운 후, 왕건이 경주를 방문한다. 경주의 백성들이 왕건의 군사를 보면서 "옛날 견씨(甄氏)가 왔을 때에는 마치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하구나(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라고 말했다고 한다. 견훤에 의해 옹립된 경순왕이 왕건에게 더 끌리고 만 것, 경주 백성들이 왕건을 찬양한 것은 견훤의 군대가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승자의 기록이니 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 대목에서 삼성의 경영과 일부 학생의 시위 모두에서 인심의 문제를 생각해봤다.


삼성이 일류기업으로 주가를 올리면서도 어두운 그림자가 적지 않음을 분명하다. 1등 기업의 오만에 빠져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막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삼성에 대한 질책은 단지 1등 기업이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경영방식에 대한 반발로 인한 것이라고 많다. 삼성이 노동계나 시민단체 쪽에서 인심을 많이 잃은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마찬가지로 이번 집회에 참석한 학생들 또한 상당히 인심을 잃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학내에서는 방법론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도가 지나쳤다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인심을 잃으면 삼성의 그 휘황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동탄압의 괴수가 되고, 일부 학우들의 노동자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 옹고집으로 비춰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리를 마련한 학교측도, 이에 응한 삼성측도, 집회에 나선 학생측도 상처를 입었다. 다 지나간 마당에 쓸데없는 바람이지만 학교측은 학위수여식을 조촐하게 치르려고 노력하고, 학생들은 피케팅 정도의 시위로 의사를 개진했다면 더 모양새가 나았을 것 같다. 인촌기념관 셔터를 거세게 흔드는 학생들의 모습이나 그렇다고 불만에 찬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학교측, 삼성측의 모습이나 다 보기 좋지 않았다. 양비론 같지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욕먹기 딱 좋은 그림이다.^^; 단순 해프닝으로 처리하고 넘기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의 긁어 부스럼은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이번 학생들의 시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나이지만 참가학생의 징계에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이번 사태에 대한 찬반은 교우님들과 학우님들이 판단할 문제다. 대내외적으로 우리의 옹졸함을 자랑할 속셈이 아니면 말이다.^^;


지난 한승조 사태 때 충분히 욕을 먹었건만, 이번 학위수여식 사태로 또 적잖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것 같다. 더 이상 액땜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고대 100주년은 고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이들에게는 즐거운 잔치이기 때문이다. 100이라는 숫자를 채워온 지난 세월을 경애하면서 관용과 화합을 생각해본다. 끝으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것도 절대시되어 성역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삼성이 이룩한 성과가 소중한 만큼 삼성이 저지른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도 소중하다. 이미 많은 국민들이 삼성의 세계적 활약을 내 일처럼 기뻐하며 격려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쓸데없이 인심을 잃을 일은 없었나 반성하면서 혁신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천민 자본주의를 넘어선 아름다운 기업으로, 사랑 받는 기업으로 나아갈 것을 기대한다.^^ - [憂弱]


추신 - LG-POSCO 경영관 건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이필상 경영대 교수님을 생각했다. 평소 경제개혁에 대한 소신이 분명하신 분이지만 학생들의 보다 나은 강의 환경을 위해 각 기업체를 돌아다니면서 기부금을 얻어내기 위해 분투하신 일화는 경영대생들이 높이 기리고 있는 바이다. 건전한 기부문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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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연의꿈 2005.05.04 17:2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마키아벨리는 개인이 공화국 내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지게 될경우 공화국이 그에게 의존하게 되고 인민은 그에게 휘둘리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자는 공화국의 적이라고 보지요..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모습과 네티즌들의 반응이 딱 그거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경제를 짋어진 이회장께 어찌 감히 그런 불손한 짓을! 하는 반응이네요..
    학교가 직업인 양성소가 되는 것도 모자라
    자본권력에 아첨하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다만 님의 글중에 기업인에게 철학학위를 주는것이 별문제가 아니란 것은 동의하기 힘들군요
    같은 것은 같게, 다른것은 다르게 대하는 것이 정의라고 볼때에
    철학적인 업적은 없는 (경영마인드를 철학이라고 말하진 않으시리라 믿습니다.)기업인에게
    철학학위를 준다면
    많은 철학도들은 좌절할수 밖에 없겠지요...
    정외과 학위였다면 전 아마 제가 정외과를 택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2. 새우범생 2005.05.04 18:5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네티즌들의 지나친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손꼽히는 경제계 리더에 대한 예우가 너무 부족했다는 지적에는 수긍하는 편입니다. 예우가 아니라는 반응을 자본권력에 아첨 운운하는 것도 동감하지 않고요.

    철학학위에 문제에 대해서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이 회장 같은 장사치는 경영학 학위면 족하다는 유의 반응에 질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회장의 직관적 리더십 같은 경영방식과 철학과의 상관관계는 찾기 어렵지요. 지적하신 대로 철학적인 업적은 사실상 전무하고요. 이미 학교에서 밝힌 학위 수여 이유도 "인재와 기술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삼성은 물론 한국 기업 전체의 혁신과 질적 변화를 이끌며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회장이 명예 철학박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가령 1995년 우리 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를 수여한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의 철학적 안목을 기리는 사람도 거의 없듯이 말입니다. 물론 아무리 명예라고 하지만 특정 전공분야를 명시한 학위가 수여된다는 것은 순수하게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형평성에 어긋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명예박사 제도 자체에 대한 별개의 문제지 굳이 이 회장과만 연관해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요. 이야기가 샛길로 새지만, 기업 경영자가 인문학적 깊이를 가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고 해서 굳이 철학박사라서 분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하간 일각의 공부는 때려치우고 돈 벌어서 학위나 사자는 유의 반응은 참 저열하네요. 학교는 돈을 위해 명예를 팔고, 삼성은 명예를 돈으로 샀다는 욕을 먹을까 두렵습니다. 물론 기업의 사회환원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고, 기왕이면 조건 없는 기부문화가 확산되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업의 부차적인 기능일 뿐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을 겁니다. 돈으로 명예를 사면 얼마나 살 것이며, 그렇게 이룩한 명예를 누가 얼마나 알아줄지 의문이고요. 저는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봤는데 생각보다 파장이 커져서 놀랐습니다.

    끝으로 대학 졸업생 중에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기업의 볼멘 소리가 엄살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학과 기업이 동반자적 관계로 더욱 밀접하게 교류하는 것이 어떤 식이 되어야 할지도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3. 청연의꿈 2005.05.04 21:0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건희 회장에게 철학박사가 더더욱 안어울리는 것은 삼성의기업문화 때문이겠지요..
    멀리 가지 않아도 안암동 래미안 건설 철거 투쟁당시
    삼성측이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자행한 일만봐도..(뭐 철거 현장에선 흔히있는 일이겠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학문 중 최고봉인 철학 학위에 어울리는가 싶습니다..

  4. 새우범생 2005.05.05 08:2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철학을 좋아하는 녀석이지만 굳이 철학이 학문의 왕좌를 차지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철학은 신성하고 경영학은 비천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건희 명예 철학박사가 철학의 위대함에 누를 끼칠 것 같지도 않고요. 명예박사 제도의 문제에 대한 말이 많지만 더 잘하라는 채찍질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5. KIN사이다 2005.05.17 16:0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예우는 무슨 예우? 그렇게 예우를 좋아하고 사랑하신다면,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납치, 감금, 폭행한 심각하게 反예우스러운 짓에 대해선 침묵하는 당신이 참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진실과 실천 사이에 대한 평에 있어서 양비론의 끝은 '비겁함'의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6. KIN사이다 2005.05.17 16:1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하지만 철학을 사랑하는 인문학도들과 이 땅에서 철학적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들에겐 심각한 박탈감을 줄 것 같군요. 게다가 반철학적 지성의 대표적 절대권력으로써 나쁜짓 다 해온 절대권력에게 마치 숭배하듯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주며, 이때 철학과 교수들에게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았던 점은 더더욱!!! 핑계대지말고, 솔직히 말하쇼. 정의로운 부분도 동의하는 척 하지말라구요. 오히려 솔직하게 무노조경영은 별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은거 같습니다.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자기 삶에 솔직하지 못한 자유주의는 부시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7. 새우범생 2005.05.17 17:2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번 사건이 정의와 불의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뭐 일부 학생들은 스스로가 정의라고 생각하며 이번 일을 주도했겠지만 말입니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학교와 일부 학생들의 태도 모두가 적절치 못했다고 보기 때문에 양비론적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행동 혹은 실천의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삼성을 욕하고, 학교를 욕하면 진실을 옹호하고 의기로움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저를 비겁하고, 절대권력을 숭배하고, 부시스럽다(!)고 보시는 것이야 좋지만 행동 혹은 실천의 문제가 그런 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부정적인 학내 여론을 재벌권력의 하수인쯤으로 취급하려는 태도가 더욱 반발을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우려스럽습니다. 부정적인 의견들을 삼성의 부정적 측면은 죄다 외면하는 놈들로 구획을 지으신다면 할 수 없지만요. 제가 아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해서 두부 자르듯이 썰지는 못하겠네요. 끝으로 제가 꾸리는 자유주의가 부시의 그것과 같아질 수 있다는 지적 달게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