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9/18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
  2. 2008/09/02 법치 효능감이라는 몽상
  3. 2008/09/01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2)

어느덧 잊혀져 가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생생하다. 현직 의경이 전의경 제도 폐지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묘했다. 입만 살아 움직이는 내가 습관처럼 말하던 전의경 제도 폐지 주장과는 차원이 다른 무거움이 느껴졌다. 입으로 사는 사람과 몸으로 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모든 것을 몸으로 살아낼 수는 없으니 입이 필요한 때가 있다며 자기방어를 발동하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이길준님을 두고 군복무 부적응자가 소영웅주의에 빠져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고 폄하하는 비난 댓글을 보며 마음이 허전했다. 내 또래인 이 청년이 자신의 행동이 낳을 후폭풍을 짐작하지 못했을리 없다. 법 어기는 걸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상층부에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소시민은 국법의 지엄함을 잘 알고 있다. 범법자가 되는 멍에를 감수하면서까지 이길준님이 지적하려고 했던 문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것이 좀 더 슬기로운 모습이다. 제 삶의 주인이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무엇을 특별히 주장했다기보다는 오는 2012년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고 단계적으로 경찰공무원으로 대체하기로 한 지난 참여정부 시절의 결정을 지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때의 결정을 번복하려고 하고 있어 안타까워하는 수준이었다. 박종달 병무청장은 9월 1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해 “2011년까지 전·의경을 (매년) 1만2천명 수준에서 유지(배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라며 전·의경 제도 폐지 방침을 백지화했다. 이명박 정부가 끝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쇠고기 정국에서 그랬듯이 앞으로도 전의경을 정권 안보의 방패막으로 삼을 모양이다.


이러한 우려가 착착 현실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이길준님이 정성껏 쓰신 양심 선언문의 전문을 꺼내 읽는다. 비장미로 흐르기보다는 낙관적인 자세가 묻어나는 글을 보니 이런 것이 마음을 담은 글의 힘이구나 싶다. “내 결정이 우리 사회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이길준님의 말씀은 오래도록 큰 울림이 될 것 같다. 문득 “각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는 최순영 전 의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각성이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길준님이 보여준 행동도 각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리라.


내가 이런 식의 각성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길준님은 국가의 폭력을 성찰하는 각성을 했지만 군복무를 통해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의 가치를 도두보고 자신의 삶을 검속하는 방편으로 삼는 각성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나는 그 각성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길준님의 각성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말자 정도의 해명을 보태고 싶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국방일보에 늘 등장하는 훈훈한 미담 사례만으로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적인 발언을 통해 알리는 분들도 있다면 이 땅이 좀 더 윤택해진다고 믿는다.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칭찬하는 건 한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불가피성을 이유로 남발될 때 나는 얼마나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한다면 이런 식의 다채로운 각성이 만개할 텐데 나는 얼마나 귀담아 들을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 제2장에서 이미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단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제약한다면 의롭지 못할 뿐더러 이롭지 못하기까지 하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나도 그 풍요로움에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각성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며 넉넉하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정법에 어긋나는 각성을 마주칠 때 엄정한 처벌을 수행하는 정성을 조금 여투어서 처벌의 근거가 튼실한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시민의식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각성을 옹호하는 분들이 좀 더 넉넉한 태도를 보여주시길 바란다. 우리네 민주주의가 고양될수록 이러한 넉넉함은 권장사항에서 의무사항에 가까워질 것이다. 가령 경찰 행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전의경 제도의 존치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분이 다수파고 전의경 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소수파라면 다수파가 좀 더 절제와 경청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다수파의 노력은 언젠가 소수파로 전락했을 때도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는 든든한 보험으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그리는 ‘각성’은 전통을 긍정하고 상식을 존중하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용기다. 사람 마음이 매끄럽게 나눠지지는 않겠지만 용기에는 여러 무늬가 있고 그것들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주역』 구절이 그 모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열린 자세로 듣는 양적 변화를 쌓는 것이 첫 번째 용기, 양적 변화가 축적되어 질적 변화로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품는 것이 두 번째 용기, 그 질적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티끌만큼 바꾸는 게 세 번째 용기로 삼아볼 수 있겠다(후배 정태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다). 세 번째 용기는 이내 첫 번째 용기와 잇닿는다. 특히 애써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안 들리는 소수파나 약자의 목소리를 좀 더 챙겨 듣는 것도 첫 번째 용기를 키우는 훌륭한 방편임을 유의해야 한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각성이 세 가지 용기를 통해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정조대왕은 총명함이 발현하는 ‘속도’보다 총명함을 유지하는 ‘지속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끝끝내 지키는 사람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아실현을 위한 학문)을 하게 된다”라는 말씀이다(『일득록』 「문학」2). 각성도 마찬가지로 속도보다는 지속도에 좌우된다. 정조대왕이 “일시적으로 빼어난 재능은 한순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듯이 각성 또한 섬광처럼 스쳐 가는 순간으로 그친다면 둘레의 감동을 자아내지 못한다. 순간의 호기로움으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고, 짧게나마 그 실행을 위해 동분서주하기는 쉽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자신이 지녔던 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지극한 수고로움이 따른다. 각성은 눈부시지만 그 빛남은 혜성이 아니라 항성이어야 마땅하다.


얻어먹는 밥에 연연하는 식객의 삶보다는 땀 흘려 개척하는 주인의 삶을 선택한 이길준님을 응원한다. - [無棄]


<추신>
이번에 알게 된 내용인데 독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남아공, 슬로베니아 등의 나라에서는 군인노조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모병제 국가에서 직업군인들이 결성한 조직이겠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을 넓혀볼 좋은 소재였고 참신한 경험이었다. 하기야 지난 7월 말 서울시 교육감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러 상상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산물일 게다.

2008/09/18 00:51 2008/09/18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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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불법에 대한 혐오는 정말 놀랍다. 근친증오라는 말이 떠올랐다면 실례가 되려나?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분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는 분들이 법치주의를 무력화하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말씀하시니 민망하다. 이 분들이 요즘 불법집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손해배상청구를 쉽게 하기 위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집회의 인파를 보고 “뼈저린 반성을 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반성은 법치를 바로 세우겠다는 아름다운 목표를 내거는 것으로 구현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대통령의 법치는 평평하다기보다는 기울어진 듯싶다. 이 법치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나 쟁의에 돌입한 노동자에게 더 엄정하게 적용될 공산이 크다.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시위 집단소송제는 임지봉 서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집회나 시위가 불법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사전에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크다. 시민들에게 자신이 참여한 집회나 시위가 불법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 혹은 검속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입법의 주된 목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이룰 건전한 시위문화는 그리 탐스럽지 않을 게다.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고 나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한데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야간 집회를 원천적으로 불허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일말의 고민도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


참여연대 공익법 센터의 논평을 통해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국가나 대기업의 불법행위를 견제하기 위한 제도이지, 돈도 없고 우월적 지위에 있지도 않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에게 수십억, 수백억원의 위협성 민사소송이나 제기하라고 있는 제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약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제도로 고안된 집단소송제가 국가 권력의 또 다른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더군다나 한나라당은 현행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등에 대해서는 재계의 반발을 걱정한 탓인지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이중적인 잣대를 드러냈다. 불법집회에 대한 피해 구제를 하겠다는 본래 취지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도를 징벌하겠다는 욕망만이 퍼덕거린다. 김용철 변호사는 “<PD수첩> 수사하듯, 삼성을 수사했더라면 아마 우리 사회가 많이 달라져 있을 게다”라고 푸념했다. 법이 가진 자와 힘센 자의 손아귀에 맴돈다는 탄식이 묻어난다.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학업 효능감이라고 부르고, 성공적으로 도전과제를 마칠 수 있다고 여기며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하는 것을 자기 효능감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응용해서 정치적 효능감이나 정책 효능감 같은 말도 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효능감들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법치 효능감(constitutional efficacy)’이 아닐까 싶다. 법을 지키면 나에게 이익이 되고,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푸근함 같은 감정 말이다. 슬프게도 대한민국의 법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은 ‘법치 효능감’을 다른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으신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진 민주주의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시위 집단소송제를 제정하려 하겠는가. 정부 여당이 기획하는 법치 효능감을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기 힘들겠다는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다수 국민의 지지에 따를 수밖에 없는 다수파기관의 성격을 지닌다지만 시위 집단소송제가 다수의 견해를 좇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다수파기관이면서도 다수의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다. 여하간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은 비다수파기관이라고 불리는 사법부다. 일전에 노회찬 전 의원은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 아니라 만명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지적이 매섭다. 앞으로도 행정부와 입법부는 자신들이 정의한 법치 효능감에 입각해 각종 법안을 쏟아낼 것이다. 이를 일차적으로 견제하는 힘은 사법부다. 사법의 정치화나 사법적극주의에 대한 논란이 적잖다. 적어도 사법부가 지금보다는 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적극적 행동을 했다면 지금처럼 법치 효능감이 낮지는 않았으리라. - [無棄]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이 그 구성과 존립이 다수국민의 지지 획득 여부에 달려있는 기관을 다수파기관이라 부른다. 입법부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대통령은 선거에서 재선되기 위해 항상 다수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신경써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는 삼부 중 유일하게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임명’되는 비다수파기관이다. 따라서 다수국민의 의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수국민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잘 조직화되지도 대표되지도 못하는 약자의 이익을 판결을 통해 획기적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을 가진다.
- 임지봉 서강대 법학과 교수, [목요일언]약자 및 소수자의 법률가 中, 법률신문 2006.09.01

2008/09/02 04:01 2008/09/02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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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人昭昭 我獨昏昏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어수룩하고,
俗人察察 我獨悶悶 세상 사람 모두 살피고 따지는데 나 홀로 답답합니다.
澹兮其若海 담담하구나, 마치 바다와 같이.
飂兮若無止 몰아치는구나, 마치 멈출 곳이 없는 듯이.
衆人皆有以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而我獨頑似鄙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도덕경』 20장의 일부다. 내게는 여러모로 각별한 구절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온라인 필명(혹은 별명)을 만들어 썼을 때 아독혼민(我獨昏悶)이라고 지은 것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2003년 말 이래로 ‘새우범생’이라는 별칭을 쓴다). 고요히 흐르는 모양을 묘사한 담혜(澹兮)는 내가 스스로 지은 생애 최초의 호(號)이기도 했다. 『도덕경』이 본래 어려운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20장의 이 구절은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모양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노자의 실존적 고독이 묻어나는 대목이라고 해석했다.


노자도 여기서 자기의 이런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 희희 낙락하고, 똑똑하고, 영리하고, 분명하고, 여유 있고, 쓸모 있고, 목적 의식이 투철하고 희망으로 가득한 것 같은데 자기 혼자 멍청한 것 같고, 맹맹한 것 같고, 촌스럽고, 답답하고 미욱하게 보이고, 빈털터리 같고, 정처없이 떠다니는 것 같고……. 하면서 자기의 ‘홀로임’을 슬픈 어조로, 그러나 담담하게 읊고 있다.
- 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1995, 97쪽


왕필은 “무엇을 바라고 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므로 어둡고 멍청한 것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둔하고 또 고루하다고 했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하상공은 “뭇사람들은 유위하는데 나 홀로 무위하여 세상의 일반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풀었다. 대체로 억지로 하려는 일이 없이 순리대로 살다보니 세속적 기준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고독했다. 나는 평균적인 삶을 사는 분에게서 배우듯이 평균적인 삶을 살지 않은 분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노자는 초월적 발상을 통해 세상의 이분법을 극복하려 한다. 김진석 선생님은 ‘초월’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포월(匍越)’을 제시했다. 현실의 경험과 인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둘레의 현실을 부둥켜안고 기어서 넘어가자는 말씀이다. 여하간 ‘포월’하며 ‘다른 삶’을 살고 싶다. ‘다른 삶’에 대한 열망 역시 또 하나의 목적이 되어 내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삶’에 대한 과시는 또 하나의 지적 허영심이 아닐까? ‘다른 삶’을 꾀하는 것이 결국은 세속적 기준에 맞추려는 정성을 회피하는 면죄부는 아닐까? - [無棄]

2008/09/01 02:37 2008/09/01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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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612 2008/09/01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자신의 모습에 회의가 듭니다. 진위를 가릴 수가 없어 방황하네요. 외롭습니다.

    새우범생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많은 글 올려주세요. 위로가 됩니다.

    • 익구 2008/09/02 0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생이 부질없다고들 하지만 이는 남몰래 나쁜 짓, 못된 짓을 일삼고, 남을 헐뜯고 비방하면서 이루어낸 것이 부끄럽고 허망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덧없는 세상사에서 치열하고 재미나게 사는 모습마저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겠죠. 노자께서 토로하신 고충이 정확히 무엇인지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탐욕과 성냄을 걷어내고 고독마저 벗삼는 여유가 진짜 자유로운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듯싶어요. 저도 요즘 제 자신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모멸감이 들기도 하지만 외로움을 억지로 벗어나려 하지도 않으면서 너무 외로움에 빠져 지내지도 않으려고요. 많이 웃어 봅시다.^^